바우하우스
배경 (39p)
1. 시대적 배경
1917년 독일의 이웃 국가 러시아에서 일명 볼셰비키 혁명이라 불리는 '10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1918년 9월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 패망한다. 바우하우스 개교 1년 전의 일이다. 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팽배했던 독일 안에서도 10월 혁명을 뒤따르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패전 직후인 11월, 독일에서 황제 제국이 붕괴되며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의회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권력 투쟁에 나서며 1919년 초에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할 정도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독일 사회 곳곳에 혁명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는 무리가 등장했다. 모순된 이전의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은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고, 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화 단체는 여러 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다. 예술가와 지식인은 새로운 예술을 주창하고 나섰는데, 1918년 창단된 '11월 그룹(Novembergruppe)도 그중 하나이다. 개혁적 예술가 라이오넬 파이닝어,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미스 반데어로에 등 170여 명이 '11월 그룹'에 참여했다.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는 발터 그로피우스도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 이들은 이후 나치가 '변종 예술가'로 지목해 망명하거나 박해를 받는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예술을 찾는 진보적 지식인의 집단적 움직임은 바우하우스라는 거인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 산업적 배경
독일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근대화에 뒤처진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19세기 말 1871년 독일은 비스마르크를 통해 뒤늦게 연방 국가 형태로 통일되었다. 통일이 늦어진 탓에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광대한 식민지를 차지할 시간도 없었고 천연자원도 부족했다. 독일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집중하고 있었고 특히 공업 생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당시 유럽 제국주의의 한 축이 식민지였다면 다른 하나는 해외 무역이었던 탓이다. 이미 식민지 경쟁에서 뒤처진 상황이었므로 해외 무역의 주도권이라도 잡아야 했고 독일의 수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공업 제품의 품질 향상에 있었다.
독일의 공업에 대한 관심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단적인 예로, 당시 런던에 있던 독일 공사관에 1896년 이례적으로 건축가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파견되었다.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산업화를 독일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 진보적 지식인이다. 또 공업 도시 바이마르 지역에는 제품의 품질 향상을 위해 벨기에 건축가 앙리 반데벨데를 초빙해 1902년 공예연구소를 설립한다. 이 공예연구소는 바이마르 그랜드 두칼 예술공예학교로 발전해 반데벨데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이 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교장 반데벨데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되면서 문을 닫는다.학교는 폐쇄되었고 건물은 이후 바우하우스 교사로 사용된다. 그리고 반데벨데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그로피우스를 추천한다.
독일공작연맹 (42p)
1907년 뮌헨, 무테지우스 주도로 '독일공작연맹' 결성.
무테지우스는 영국에서 존 러스킨과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에서 많은 영감을 받음.
하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명확히 달랐음.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공예인 단체) : 중세 장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을 거부하고 낭만적 형태의 수공예 운동을 진행한 반면,
독일공작연맹(예술가, 건축가, 기업인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 경제인 단체) : 과학기술을 대폭 수용하고 공업 생산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 독일 내 중요한 산업과 예술, 디자인을 연결하고 주요 건축가, 예술가, 디자이너를 동원한 국가 차원의 산업 진흥 정책 기구로 구성됨.
당시 산업화에 열중하던 독일의 분위기는 젊고 유능한 해외 건축가에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건축가 눈에는 독일이 보편적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의 실험 무대이자, 국경을 초월해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그려내는 세계주의적 환경을 제공하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로피우스 : 파구스 공장 (45p)
그로피우스 : 베렌스를 통해 근대 합리주의와 건축을 배웠고, 그의 영향으로 1910년부터 독일공작연맹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2-3년동안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한 글피우스는 1910년 개인 사무실을 연다. 그는 1911년 아돌프 마이어와 공동으로 알펠트에 있는 파구스 공장을 맡아 벽을 강철과 유리로 설계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한다. 이 건물의 전면에 사용된 유리 커튼월은 형태가 기능을 반영한다는 근대 디자인의 원리이자 노동자에게 더 좋은 노동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이념이 반영되어 있었다. 강철과 유리라는 소재는 훗날 국제주의 건축의 상징처럼 인식된다. 이 건축은 '신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며, 1946년 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1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로피우스와 마이어는 베렌스의 고전주의 영향과 베렌스가 즐겨 사용한 무거운 석재를 기피하였다. 대신 그들이 채택한 것은 강철과 콘크리트 골조로 지탱하는 세 개의 층을 덮은, 완전히 유리만을 사용한 최초의 파사드였다. 선을 매우 중요시하여 수직과 정육면체를 특히 강조하였으며 빛과 개방성의 느낌은 모퉁이에 구조적인 지지물이 없다는 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파구스 공장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과거에는 견고한 형태의 건축이라고 여겼던 공장 설계의 '기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건물이다. 한 세대 다음의 건축가들을 위해 길을 열어준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구스 공장 [Fagus Factory]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존, 박누리, 정상희, 김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내 생각 : 지금 시대에는 굉장히 흔한 건축물 같은데, 과거에는 매우 도전적인 건축물이었을 것 같다. 지금의 건축물들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건축물들이라 생각하면, 또 다르게 보일 것이다.